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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1696
2009.09.20 (16:21:08)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런데 정작 이 말에 책임지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나님께 모든 삶을 맡겨드린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
과연 무엇으로 하여금 이러한 고백이 나오게 하며, 그런 삶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하겠다는 뜻인가..
전도를 하겠다는 뜻인가, 찬양을 하겠다는 뜻인가, 기도를 하겠다는 뜻인가!


1. 삶을 드리기 전에 겸손함으로 엎드려라.

이런 이야기는 대부분 보통 은혜를 받았다는 상황이 연출된 가운데 결단내어지는 경우가 많다.
마치 자신의 감정이 불 타올라서 무엇이든지 다 해낼 수 있을거 같은 느낌에 고백하는 경우가 많다.
마태복음 26장 17절 이하는 주님의 만찬의 내용을 이야기 한다.
이 때, 예수님은 만찬을 마치시고 29절에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30절에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란산으로 나아가니라" 제자들의 경배를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베드로의 부인을 예수님께서 예고하신다.
35절에 베드로는 자신이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며, 베드로 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미 부인할 것을 알고 있었다. 제자들이 떠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죽을찌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언제든지 주를 따라가겠다는 이들이 36절 이하에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한시도 깨어있지도 못하고 잠든 모습을 예수님이 꾸짖는 내용이 나온다.
이 어찌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모든 삶을 드리겠다고 해 놓고 한시도 깨어있지 못한 이들의 모습. 과연 이들이 바치겠다고 한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2. 정말 다 드릴 준비가 되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고백하면서, 한편으로 자신들의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세상과 타협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사기 11장 30절 이하는 입다가 하나님께 암몬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번제는 태워서 하나도 남겨버리지 않는 제사를 뜻한다)  그는 결국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얻었지만, 미스바에 돌아와 처음으로 그를 맞이한 건 입다의 무남독녀 였던 것이다. 사람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서원은 결국, 자신의 유일한 딸을 재로 태워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입다는 결국 자기 옷을 찢으며 애곡하게 된다. 입다는 자신이 모두 다 드릴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지만, 실상 그 모든 것에 자신의 딸은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인즉슨 자신의 딸이 나올거란 예상을 하였더라면, 그가 애곡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결국 그는 그의 딸을 직접 불에 태워 죽여버리게 된 살인자 아닌 살인자가 되어버린 꼴이다.

3. 인간의 유한함으로 하나님께 만족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기독교는 신앙인가? 종교인가? 라는 질문의 잣대는 기준이 어디있는가이다.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생활에 그치는 이들은 자신들 각자가 세워놓은 기준에 맞추어 교회를 다니곤 한다.
마태복음 19장 16절 이하에 나오는 부자청년은 이 때 당시의 많은 바리새인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을 율법이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어 놓았다. 이 청년은 정말 누가보기에도 완벽해 보였다. 그 이유는 그 청년이 스스로 만든 율법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모든 법을 온전히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자청년의 치명적인 실수는 그 테두리 안에는 자신을 향한 것들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에 순종하지 못하고 근심하며 떠나는 것을 보게 된다. 결국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생수의 강물이 내려오는 통로를 막아버린 것이다. 자신 이외에 다른 이들에게 동일한 사랑을 흘려 보내지 못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하자 제자들이 놀란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원의 역사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라고 이야기 하신다.
그렇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수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도 없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수의 강물로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결단코 비굴한 삶이 아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의 존재가치의 가장 아름다운 이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속박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영원히 간직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무언가 더 가질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없이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삶을 더욱 멋지게 풍요롭게 살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우리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것 하나님의 형상을  다른 어떤 것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인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생각이나, 욕심이나, 교만함이나 그 어느 것으로 불순물들을 섞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저 멀리 우주 너머에 계시며, 우리가 찾아가는 그런 여행자의 마음을 버려라. 그저 우린 성령님을 초청함으로 인하여서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2009.09.22 (14:37:40)
이승환목사
귀한 메세지 감사^^
(*.254.4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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