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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1 (06:42:20)
1.오늘의 말씀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딛 2:14)

2.묵상하기

교회에서 모태신항을 "이것도 못해, 저것도 못해"라는 말만 늘어놓는다는 의미에서 "못해신앙"으로 장난삼아 부르기도 하는데, 선교사로 헌신하기까지 나의 신앙이 딱 그러했다.

나는 모태신앙이 아니라 "못해신앙"에서 출발해서 진짜 집사가 아니라 나일론 믿음을 가진 "나집사"로 살았다.

한마디로 "발목신자"였다.
발목 아래만 교회라는 물에 담그고 발목 위의 온몸은 세상과 접하며 세상을 사랑하며 사는 엉터리 신자였다.

◈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갑자기 찾아온 불안감에 나는 집에 돌아와 웬일로 성경을 읽어보기로 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을 읽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갑게 들어왔던 이야기라 대충 넘어가려는데, 나의 눈을 열게 한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였다.

데라는 그의 식솔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던 중 하란에 와서 정착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대로 머물러 살다가 죽었다.

목적지는 가나안이었는데 중간에 하란에서 죽은 것이었다.
창세기에서 모세는 데라의 마지막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11:32

◈ 사실 나는 그때 카이스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덕 연구단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아주 비싸고 비싼 명품 오디오 세트를 장만하는 취미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주중에는 골프에 미쳐서 어떤 때에는 연구하는 시간도 미뤄가며 골프에 한참 열을 올리고 있었다.
또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산과 바다를 찾아다니면서 인생을 즐기려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구절을 묵상하는데 자꾸 두 단어가 반복되는 것이었다.

"데라...죽었더라, 데라...죽었더라, 데라...뒈졌더라."
어느새 "죽었더라"는 단어가 "데라"와 합쳐지면서 "뒈졌더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어드덧 데라의 삶에 나 자신을 투영하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이처럼 산다면 맞게 될 내 인생의 결말을 보았다.

"최하진은 80세를 향수하고 유성에서 골프공에 뒤통수 맞고 뒈졌더라."
그때 나는 "죽는" 인생이 아니라 "뒈져버리는"인생이 되어가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데라 할아버지가 고맙기 그지없다.
데라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여전히 무언가를 향유하는데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 나는 세상 것을 향유함으로 스스로 만족을 얻고 뿌듯함을 느끼고 싶었다.
아니 더 솔직해진다면, 좀 편하게 살고 싶었다.

세상 것들이 내 인생의 보험이라고 생각했다.
노후대책과 행복을 위해서는 젊을 때 열심히 축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은 저장고 같은 인생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성공이란 자기 혼자서 수천수만 명분을 소유하는 것이지만, 진짜 성공은 자기로 말미암아 수천수만 명이 사는 것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 12:3

지금 나는 예전에는 지루하게만 느꼈던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말씀을 너무너무 좋아한다.

이 말씀에서 말하는 인생이 자기로 말미암아 수천수만 명이 사는 인생, 행복을 흘려보내는 통로와 같은 인생이기 때문이다.

정체된 사해와 같은 "저장고 인생"이 아니라 갈리릴 바다와 같은, 흘려보내는 "통로 인생"이 되자.
인생을 즐기면서 헛된 것에서 삶의 행복을 찾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인생을 걸고 땅의 모든 족속에게 주님의 복을 흘려보내자.(네 인생을 주님께 걸어라-최하진)

3.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모른척하고 좀 더 편하게 좀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사는데만 전전긍긍했던 저의 어리석음과 죄악을 용서해주세요.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목적과 그 사명을 깨달아 하나님의 축복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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