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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9 (10:24:16)

1.오늘의 말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장 2절)

 

2.묵상하기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에 이끌리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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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 동안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실 때, 마귀가 다가와서 했던 유혹은 바로 이것이었다.

마귀의 첫 번째 유혹이 무엇이었는가?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4:3)

성경은 마귀의 첫 번째 유혹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 4:1,2)

예수님이 굶주려 계신 그 상황에서 마귀는 “인류 구원이고 뭐고 네 배부터 채워라”라고 유혹한다. 네 필요를 채우라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유혹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속성은 아가페 사랑, 이타적인 사랑, 십자가의 사랑이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5,6)

여기서 내 눈에 확 띈 것이 “너를 위하여”이다. “인류 구원이고 뭐고 간에 일단 너부터 살아야 하지 않겠니? 너를 위하여 뛰어내려라”라는 것이 마귀의 두 번째 유혹이었다. 세 번째 유혹도 똑같은 원리이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8,9)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도 없는 ‘십자가’라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펼치시려고 하고 있다. 그때 마귀가 노린 것은 그것을 잊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엄청난 사랑 말고, 그저 네 배나 채우고 모든 것을 누리면서 잘 먹고 잘살면 안 되겠니?” 바로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마귀가 여전히 던지는 공격의 핵심인 것을 알아야 한다.

 

호세아 선지자 당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인 바알 신을 섬기게 된 핵심적인 이유도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구약학자 김필회 교수님은 《호세아 주석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신을 좇았던 이유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 바알 종교는 제의적 의무만 잘 행하면 다른 윤리를 요구하지 않는 종교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그저 예배만 잘 드리면 어떤 부담도 질 필요가 없었다. 둘째, 바알 종교는 기본적으로 풍요 제의에 속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제사 한 번 잘 지내고 나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즉 풍요와 번성과 안정을 충족시켜주는 종교가 바알 종교였다. 그래서 호세아서 2장 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호 2:5)

완전히 대박 아닌가? 예배 한 번 잘 드리고 나면 어마어마한 물질적 풍요가 찾아온다고 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렇게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 신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겉으로 보이는 간판에는 ‘바알 교회’라고 안 써 있어서 그렇지,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바알 신을 섬기던 자들과 비슷한 욕구 가운데 살고 있는가?

 

내가 예배 한 번 드려줄 테니 더 이상은 요구하지 마세요.’ ‘내가 지난주에 분명히 시간 들여서 예배드리고 헌금까지 했는데, 왜 나에게 돌아오는 게 없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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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리 내면의 욕구를 방치했기 때문에 지금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기독교가 어떤 종교보다 탐욕과 탐심으로 가득한 저질 종교라는 비아냥거림을 당하게 된 출발이 여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온 우주가 날 위해서 돌아간다는 철저히 나 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져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그런 이기적인 세계관으로 행복할 수만 있다면, 나중에 하나님께 잠깐 꾸지람을 듣더라도 눈 질끈 감고 그렇게 하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행복의 원리가 절대 그렇지가 않다.

 

왜 그런가?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그렇게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본능,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것들은 이런 끝 간 데 없는 이기적인 태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아가페 사랑, 이타적인 사랑, 십자가의 사랑이다. 우리 같은 세속적인 사람의 상식으로는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고 와 닿지 않는 그런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가 세속적인 사랑을 흉내 내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3.오늘의 기도

 

자신을 위해 살라는 마귀의 은밀한 속삭임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기쁘게 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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