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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1 (23:14:51)

1.오늘의 말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장 6절)



2.묵상하기


창세기 14장 13절부터 16절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다.


아브람과 롯의 소유가 많아져서 그들이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게 되자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먼저 거주할 땅을 결정하라고 말한다. 이에 롯은 보기에 좋은 소알과 소돔과 고모라 땅을 택하여 동쪽으로 옮겨갔고 아브람은 그대로 가나안 땅에 거주한다. 이로써 유브라데 강을 건너온 두 사람이 처음으로 서로 떨어져서 살게 된다.


그러다가 소돔과 고모라 지역의 다섯 왕들이 다른 나라 네 왕들과 전쟁을 하다가 패하자 네 왕들이 조카 롯을 포함하여 그 지역의 모든 것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사로잡아 간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브람이 집에서 기르고 훈련시킨 318명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서 조카 롯을 구해온 사건에 대한 말씀이다.


이 사건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메시지가 있다. 먼저 롯을 살펴보자. 삼촌 아브람이 롯에게 먼저 거할 땅을 택하라고 했을 때 롯은 그의 눈에 보기에 좋은 요단 지역을 택한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 창 13:10

롯이 이 지역을 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눈에 보기에 너무나 좋은 땅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눈에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한 것이 죄는 아니다.

그러나 13절은 이 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 창 13:13

롯이 이 사실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다. 가나안이 메소포타미아처럼 어마어마하게 넓은 것도 아니고 충분히 그 지역이 어떤 지역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브람과 롯이 거하던 벧엘과 아이 사이 땅은 요단강 주변인 소돔과 고모라와 인접한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줄곧 가축을 키웠던 롯이 소돔과 고모라가 어떤 땅인지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롯은 왜 이곳을 택했을까?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가나안 지역에서도 가축 키우기에 좋은 땅이면서 동시에 가장 발달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추측이다. 즉 살기 편하고 풍족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죄에 노출될 것을 알고도 더 편하고 풍족한 삶을 택하여 그곳으로 간 것이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하게 이방 왕들에게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다. 이때 삼촌인 아브람 덕분에 목숨과 가족 그리고 빼앗겼던 재산도 대부분 회수하게 된다.


이것이 어쩌면 하나님이 롯에게 주신 중요한 메시지였을 법한데, 롯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지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이후에도 계속 소돔 땅에서 살았고 나중에는 성문에 거하는 자리에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잃었고, 또 딸들을 통해 가장 부끄러운 민족들을 낳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죄는 내 삶에
저주를 불러온다.

그래서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

앞서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에 보기에 좋은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유브라데 강을 건너서 아브라함과 함께 이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그의 마음에는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에 대한 유혹이 자리잡은 것이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에게 임한 심판과 같이 때가 되면 이 땅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일 것을 잘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롯이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로 스스로 나아간 것처럼, 지금 이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롯과 같은 삶을 재현하고 있다. 눈에 보기에 좋은 땅, 더 편하고 풍성한 것을 좇는 삶이다. 그것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문제는 그 자리에 죄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롯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겨우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된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은 얻었으나 이 구원이 성경에서 언급한 부끄러운 구원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눈에 보기에 좋은 세상의 풍요와 안락함을 좇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영원한 하나님나라와 유업을 좇아가고 있는가? 삶은 방향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모든 방향에는 그 끝과 그에 따른 결과가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영으로 거듭나서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영적인 소망이 열려 있는데도 여전히 육의 것에 매어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보다 이 세상의 것들이 더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더 실제적인 것, 더 확신하는 것을 좇아서 살아간다. 아무리 영의 법칙을 말하고 천국의 소망을 이야기해도 그것이 내게 현실보다 더 실제적이지 않다면 그것을 추구하는 삶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무엇이 내게 실제적인 것이 되는가? 내가 맛보고 경험하는 것, 그래서 나의 모든 감각 기관, 인격적인 지정의를 통해 알게 되는 것들이 내게 더 실제적이다. 신앙은 의지적으로 뭔가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다. ‘노력하면 되겠지’라는 식의 종교 행위가 아니다. 물론 어느 단계나 어느 정도의 의지적 결단과 헌신도 필요하다. 그러나 결국 신앙은 우리의 작은 믿음을 통해 임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경험하는 것이며 살아 계신 그분을 실제로 만나고 경험하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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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전체를 잘 살펴보기 바란다. 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믿음의 삶을 살았는지. 그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나타난 한 가지 사건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적으로 인식하고, 확신함으로 하나님을 좇아갔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에게 이 하나님과의 대면함이 필요하다. 예배 가운데, 말씀 앞에 설 때, 기도 가운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주시는 하나님을 영적으로, 전인격적으로 만나는 사건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다. 따라서 나는 모든 영적 행위 또는 믿음의 행위라는 과정에서 한 가지만을 간절히 구한다.


“하나님, 오늘도 저를 만나주십시오. 저에게 말씀해주십시오.”


3.오늘의 기도


하나님, 저의 삶에 실제가 되어 주십시오. 아버지 하나님을 내 삶에 맛보고 경험하여 실제가 되시는 그분이 나의 삶을 주관하시기 원합니다. 그래서 제가 죄임을 알면서도 세상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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